녹 쓴 화포가 지키는 최북단 발전소 ‘화천수력’
녹 쓴 화포가 지키는 최북단 발전소 ‘화천수력’
  • 김진철 기자
  • kjc@energytimes.kr
  • 승인 2015.04.15 01:1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제 만행으로 지어졌으나 우리 손으로 만들어낸 발전소
한국전쟁 북한 소유…탈환까지 수많은 젊은 피로 얼룩져
역사는 새로운 미래 만들어…통일시대 대비 희망을 꿈꿔
【화천=에너지타임즈 김진철 기자】아직도 녹이 쓴 화포가 지키는 그곳.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이 포구는 아직도 그곳을 향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이곳에서 눈물을 흘리거나 이곳을 향해서 눈물을 훔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청춘은 이곳에서 아직도 눈물을 흘리고 있다. 애지중지 키웠던 자식을 보내면서 흘리는 눈물도 있을 것이고 또 다른 눈물도 있을 것이다.

한때 경춘선을 타고 굽이굽이 기찻길을 숨이 차도록 달리다 첩첩산중 산길을 지나 반나절이나 돼야만 도착할 수 있었던 그곳, 그곳은 이제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터널이 뚫리면서 1시간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게 됐다. 강원도 화천.

이곳의 터줏대감이라 이름을 붙일 만한 곳이 있다. 바로 한국수력원자력(주) 화천수력발전소다.

이 발전소는 우리나라 발전소 중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다. 군대로 치자면 최전방이다. 그럼 언제부터였을까. 10년이면 강산이 바뀐다고 한다. 그렇게 7번의 강산이 바뀌는 동안 변함없이 이곳에서 전력을 생산하고 있다. 사람으로 따지면 거의 한평생을 이 자리에서 전력을 생산한 셈인데 사람으로 치자면 장인(匠人)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수차는 생생하게 돌아가고 있다.

우리 민족의 애환이 그대로 묻어 있는 곳이다. 이 발전소는 일제치하에 지어졌는데 당시 전국 곳곳에서 징용으로 끌려온 징용자 중 화천댐을 건설하다 1000명이 넘는 목숨이 끝내 광복을 보지 못하고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또 한국전쟁 내내 총성이 끊이지 않았던 곳 중 하나다. 오죽했으면 억울하게 죽어간 청춘들이 흘린 피로 발전소가 가동됐다고 했을까.

이 발전소를 두고 남북 간 치열한 접전이 있었던 이유는 남한의 전력생산량 중 30%를 차지했기 때문이었는데 휴전선이 그어진 후 이 발전소는 당시 보성강수력발전소와 함께 유일한 남한의 수력발전소였다. 물론 당인리발전소(現 서울복합화력)와 영월발전소(現 영월천연가스발전소) 등이 있긴 했으나 당시의 상황을 감안할 때 발전연료가 제때 공급됐을지는 의문이다. 사실상 무용지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수력발전은 임의로 가둬놓은 물이 떨어지면서 발생된 운동에너지가 수차-발전기를 돌려 전력을 생산하는 대형발전전원이다. 물만 있으면 언제든지 발전기 가능하다는 것이 가장 큰 강점인데 스위치를 켜고 5분 만에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 그래서 양수발전과 함께 전력산업의 ‘소방수’란 별칭을 갖고 있다. 원전이나 석탄발전 기동이 통상 1주일이 걸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말 빠른 기동이 아닐 수 없다.

화천수력발전소는 우리 민족의 온갖 회한을 비롯해 우리 전력산업의 역사와 맥을 함께 했다. 역사는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낸다는 말이 있듯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특히 한수원은 수력발전의 핵심설비인 수차의 국산화 기술개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전국에서 운영되는 수차의 설계수명이 도래되면서 국내 수요와 함께 해외수력발전시장 개척, 통일시대에 대비한 기술력을 확보하자는 차원에서 일종의 투자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화천수력발전소는 우리 민족의 온갖 회한을 비롯해 우리 전력산업의 역사와 맥을 함께 했다. 암울했던 역사가 또 다른 미래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다.

지난 70여년 화천수력발전소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 발전소의 역사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담수능력 10억 톤…발길 닿는 곳이 역사
홍수·가뭄조절 등 다목적댐 역할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 일대. 화천수력발전소 현 주소다. 서울에서 대략 160km내외의 거리다.

화천수력발전소는 우리나라 발전소 중 최북단에 위치한 발전소로 북한강 상류에 자리하고 있다. 휴전선으로부터 남쪽으로 20km 남짓. 길이 많이 좋아졌다고 하나 가는 길이 아직도 만만찮다.

화천수력발전소와의 첫 만남. 원전이나 석탄발전소처럼 웅장한 맛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 표준원전 1기의 발전설비용량이 100만kW인 반면 이 발전소는 1/10 수준인 10만8000kW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고즈넉하고 다소곳한 깊은 정취가 가슴으로 와 닿는다.

이 발전소 정문을 통과하자 마치 먼 시간여행을 온 것처럼 오묘한 기분마저 든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벤치에 앉아 있자니 ‘시간 가는 줄 모른다’는 말을 이때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이곳은 발길이 닿는 곳, 눈이 가는 곳이 바로 역사다. 그래서 이 발전소는 지난 2004년 9월 14일 등록문화재 제109호로 지정됐다.

본격적인 현장취재에 앞서 황달연 화천수력발전소 소장과 박영준 화천수력발전소 관리팀장은 화천수력발전소에 대해 이야기 한다.

화천수력발전소는 일제치하시대에 지어졌다.

일제는 동아시아 침략준비에 한창이던 지난 1939년 7월 경인공업지구 내 군수공장에 전력을 공급할 목적으로 이 발전소를 건설하게 된다. 아픈 역사다. 더 아픈 역사는 지금부터다. 당시 제대로 된 건설공법이 있었을까. 화천댐 건설과 발전소 건설에 매일 전국에서 끌려온 징용자 3000여명이 투입됐다. 사고가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하루에도 2~3명씩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요즘이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난공사였다.

화천수력발전소 건설을 마무리 짓고 나니 1000명에 달하는 징용자가 목숨을 잃었다. 이후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은 징용자까지 합하면 그 수는 헤아릴 길이 없을 정도다. 당시 일제는 댐 인근에 화장장을 2개나 운용했다는 것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화천수력발전소는 비록 일제의 잘못된 만행으로 지어졌다고는 하나 분명 우리 손으로 지은 우리 발전소임에 틀림없다.

지난 1944년 5월에 화천수력 1호기, 5개월 뒤 2호기가 각각 준공됐다. 당시 총 발전설비용량은 5만4000kW.

화천수력발전소는 댐으로 방류되는 물로 수차를 돌리는 것이 아니라 수로를 통해 수차를 돌려 발전하는 댐 수로식으로 설계됐다. 댐은 하천이 완만한 경사로나 굴곡이 많은 하천으로 바뀌는 지점에 설치돼 물을 가두는 역할을 하게 된다. 별도의 수로는 저수지 아래 물을 취수해 수차와 발전기를 돌려 전력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이 수로의 길이는 650m에 달한다.


북한강에 함께 위치하고 있는 춘천·의암·청평·팔당수력발전소는 댐으로 물이 방류될 때 발전을 하는 댐식이다. 반면 화천수력발전소는 북한강에서 유일한 댐 수로식으로 지어졌다.

보통 댐 수로식은 담수 양이 많고, 홍수조절용으로 활용하기 위한 방식인데 화천댐은 이 방식을 적용하고 있다. 화천댐의 담수양은 만수 시 10억2000톤에 이른다. 화천수력발전소를 제외한 북한강에 설치된 춘천·의암·청평·팔당댐 등의 만수 시 담수 양이 6억3000톤임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양이 아닐 수 없다.

북한강에 설치된 수력발전소는 계단식으로 조성돼 있다. 가장 상류에 위치한 화천수력발전소가 발전을 시작한다는 것은 곧 춘천·의암·청평·팔당수력발전소의 잇따라 발전의 시작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사실 화천수력발전소는 발전을 목적으로 지어졌지만 역할이나 성격은 다목적댐에 가깝다. 북한강에 있는 다른 수력발전소와 달리 홍수조절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서울 물바다사태로 지어진 평화의 댐 건설 기초공사를 시작했던 지난 1988년, 한국전력공사(現 한국수력원자력)는 북한의 임남댐(일명 금강산댐) 건설에 대응하기 위해 화천댐의 배수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화천댐 수문 아래 5개 비상방류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유자가 한수원으로 바뀐지 2년이 지난 2003년 12월 비상방류구의 설치를 완료했다. 이로써 최악의 가뭄이나 홍수상황에서 수도권의 용수공급과 홍수조절에 기여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다.



해방 당시 한반도 발전용량 172만kW
북한의 일방적인 단전…어두워진 남한

본격적인 화천수력발전소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전, 우리나라 전력산업의 역사를 살펴보자.

지난 1887년 3월 6일, 경복궁 건청궁에 전등불이 처음으로 켜졌다. 이후 우리나라 전력산업은 경성(現 서울)에 전철이 다니기 시작하면서 탄력을 받기 시작했는데 전철이 야간운행을 시작하면서 매표소 주변에 가로등이 설치됐다. 사실상 이를 계기로 전등영업이 시작됐다.

지난 1929년 한반도 총 발전설비용량은 171만2000kW에 불과했다. 이중 부전강수력발전소 등 수력발전이 95% 이상을 차지했다. 일본이 패전했던 1945년 총 발전설비용량은 172만2700kW.

해방 이후 1948년 5.10 총선으로 한반도는 남북으로 갈라졌다. 남한에서만 치러진 총선 4일 후 북한은 남한에 단전조치를 감행했다. 당시 남한의 총 발전설비용량은 5만8000kW에 불과했다.

그리고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반발했다. 1950년 5월 7만3557kW이던 전력공급능력은 3개월 만에 1만1333kW로 추락했다. 전쟁으로 전력공급능력을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실제로 38선 기준으로 화천수력발전소는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북한 치하의 발전소였다. 그래서 한국전쟁 동안 이 발전소를 둘러싼 접전이 끊이질 않았다. 한국전쟁 당시 에너지문제로 가장 접전을 벌인 곳으로 기록돼 있다.

한국전쟁 중 화천수력발전소 탈환을 위한 격전이 다섯 번에 걸쳐 있었고, 세 번이나 빼앗기로 뺏는 것을 반복했다.

얼마나 중요한 곳일까. 우리나라에서 가동되는 수많은 발전소 중 대통령이 두 번이나 직접 방문한 발전소가 몇 곳이나 될까. 그중 한 곳이 바로 화천수력발전소다. 당시 이승만 前 대통령은 두 번이나 이 발전소를 방문했다고 한다. 직접 친필로 휘호를 써줄 만큼 중요했던 요충지였다.



중공군 3만명 수몰시키면서 드디어 탈환
北 수공 대비…유엔군 화천댐 폭파 결정

지난 1951년 4월 중공군은 중서부전선에 집중된 병력을 중심으로 제1차 춘계공세에 나섰다. 통상 겨울이면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봄이면 다시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이때 펴는 공세가 바로 춘계공세다. 중공군의 첫 번째 춘계공세는 실패로 끝이 났다.

그리고 중공군은 5월 16일 주력부대를 동쪽으로 돌려 동부전선에 집중적으로 배치된 국군 6개 사단을 포위섬멸하기 위한 제2차 춘계공세에 나섰다.

그러나 국군 6사단은 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용문산전투에서 중공군 63군 예하 3개 사단을 궤멸시켰다. 이와 함께 미군 2사단은 강원도 홍천군 북쪽 벙커고지전투에서 중공군 12군의 공격을 격퇴했다. 이로써 화천댐 탈환의 기반을 마련하고 승기를 잡았다.

6사단은 용문산과 홍천강을 잇는 전선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중공군 제63군 예하 3개 사단의 공격을 막아냈다. 특히 도주하는 중공군을 강원도 화천까지 추격해 섬멸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국군 6사단은 중공군 1만7000명을 사살하고, 2000명의 포로를 붙잡는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전과를 올렸다.

이 무렵 미국 24사단 21연대와 미국 7사단 17연대는 화천-춘천, 가평-지암리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국군과 삼각형의 포위망을 형성했다. 중공군은 필사의 탈출을 시도했으나 모두 섬멸됐다.

특히 이승만 前 대통령으로부터 화천댐 탈환이란 특명을 받은 국군 6사단은 화천댐 탈환을 위해 특별한 작전을 세우게 되는데 바로 소이연막탄작전. 소이연막탄은 유엔군에서 보유하고 있던 화기로 연막이 깔리면서 살이 타들어가는 무서운 살상무기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국군은 항공기를 이용해 소이연막탄을 살포해 수만 명의 중공군이 물속으로 뛰어들어 수장하게 만들었다. 당시에 수장된 중공군이 무려 3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국군 6사단은 1951년 5월 29일 새벽 마침내 화천댐을 탈환했다. 이와 함께 북쪽으로 진격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했다.

이 전투에서 아군의 사상자는 1000명 정도로 적군의 피해에 견줘본다면 대단한 승리가 아닐 수 없다.

이후 이승만 前 대통령은 화천수력발전소를 직접 방문해 ‘대붕호’로 불리던 이 저수지의 이름을 중공군 10군과 25군, 27군을 비롯해 해병 1연대를 수장시켰음을 근거로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란 뜻을 담고 있는 ‘파로호(破盧湖)’로 새롭게 붙였다.

기쁨도 잠시, 화천댐은 우리 아군에 의해 파괴됐다. 북한이 수공(水攻)으로 공격을 할 것이란 첩보를 입수한 유엔군은 제2차 세계대전에 사용했던 어뢰로 폭파를 결정했다. 동해상에 있던 함정에서 어뢰를 가져와 항공기에 탑재했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이 항공기는 화천댐 수문을 향해 총 8발의 어뢰를 발사했고 이중 2발은 불발됐고 6발이 수문에 적중해 폭발됐다.

화천댐에 갇혀 있던 물이 모두 빠져나가면서 북한은 더 이상 수공을 펼칠 수 없게 됐다.

이후에도 적의 공격은 계속됐다. 휴전협정이 체결되기 불과 10여일 전인 1953년 7월 13일 중공군은 국군 7개 사단이 집중적으로 배치된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일대(화천수력발전소 인근) 금성지구 돌출부를 공격해 점령함으로써 화천댐 탈환을 위한 마지막 대공세를 벌였다. 그러나 국군은 화천수력발전소를 필사적으로 방어하며 끝까지 지켜냈다.


휴전 후 화천수력 전력공급의 30% 담당
국가재건 등 대형전원 맏형 노릇 ‘톡톡’

이렇게 지루하고 지루했던 한국전쟁의 막이 내렸다. 전쟁 후의 한반도…

화천수력 1호기 복구는 한국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지난 1952년 3월 시작해서 7월 완료됐고, 화천수력 2호기도 1953년 6월 착수했으나 휴전선이 그어진 후 1954년 7월에서야 완료됐다. 총 발전설비용량 5만4000kW로 당시 남한의 총 발전설비용량 19만8000kW 중 30%이상을 담당했다. 현재 원전이 우리나라 발전설비용량의 30%이상을 점유하는 것과 시대상황은 다르지만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이후 화천수력 3호기는 1957년 11월, 4호기는 1968년 6월에 각각 준공되면서 화천수력발전소는 총 발전설비용량 10만8000kW를 보유하게 되면서 한국전쟁 후 재건과 국가경제발전의 심장으로써 한 몫 톡톡히 하기에 이른다.

화천수력발전소는 당시 조선전기(주)·경성전기(주)·남선전기(주) 등 남한을 대표하는 전력3사 중 조선전기(주)에 의해 건설됐다. 그러나 지난 1961년 한국전력(주)이 창립 주주총회를 열고 7월 1일 발족되면서 소속이 바뀌었다. 또 지난 2001년 전력산업구조개편으로 한국전력공사에서 발전부문이 분리되는 과정에서 원전과 수력발전은 한국수력원자력(주)으로 소속이 또 다시 바뀌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다.

이쯤에서 ‘한국수력원자력’이란 이름을 잘 살펴보면 수력이 원자력보다 먼저다. 왜일까.

지난 2014년 8월 기준 한수원의 보유 발전설비용량은 2609만7000kW. 명실공이 우리나라 최대 발전회사다. 한수원의 전원구성을 살펴보면 원전의 발전설비용량이 2071만6000kW로 79.4%, 이어 양수발전은 470만kW로 18.0%, 그리고 수력발전이 60만5000kW로 2.3%를 각각 점유하고 있다.

전원비율만 따져보면 굳이 ‘원자력’이 ‘수력’ 앞에 있어야 하는데 상식적으로 맞다. 일부 직원들은 ‘수력’이란 단어가 앞에 온다면 ‘한+원수’란 말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지 우스갯소리를 한다.

그렇지만 잘 따져보면 대형발전전원 중 가장 기본이 되는 전원이 수력발전이었다는 점이 반영된 것이 아닌지 싶다.

실제로 수력발전의 저수지는 원전의 원자로나 석탄발전소의 보일러에 해당한다. 굳이 다른 점을 찾아보자는 수력발전은 운동에너지, 원전·석탄발전은 열에너지로 수차-터빈을 돌린다는 것. 원전의 빼 놓을 수 없는 단짝인 양수발전소도 하부 저수지에서 물을 양수하는 기능을 한 단계 진화시킨 수력발전이란 점도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수력발전은 대형전원의 기본 중 기본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우리가 기초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만큼 전력산업의 수력발전도 일종의 기초학문에 해당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365일 불이 꺼지지 않는 ‘중앙제어실’
발전소 전체 등록문화재 제109호 지정

이제 화천수력발전소를 둘러보자.

정문 입구와 마주하고 얼마 전 지은 듯 보이는 숙소가 눈에 띈다. 그리고 작은 정문(원전 등 대비)을 지나면 솔밭이 눈에 큼직하게 들어온다. 화천수력발전소 앞마당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6사단이 이 발전소 처음으로 탈환에 성공한 후 이를 기리기 위한 전공비가 위엄을 자랑하며 자리하고 있다. 이 전공비는 지난 1954년 11월 1일부터 지금까지 일찍 생을 마감한 우리의 젊은 영혼과 함께 이 발전소를 지키고 있다.

본관 건물을 지나면 이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력을 북쪽과 남쪽으로 보내는 변전소가 자리 잡고 있고 이 변전소를 통과하면 이 발전소의 핵심설비들이 모여 있는 아주 오래된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먼저 중앙제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이 발전소에서 유일하게 365일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곳이다. 매일 발전을 하는 곳도 아닌데 왜.

현재 양수발전과 수력발전은 원전과 석탄발전 등의 기저발전기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 가동하는 첨두발전기다. 그래서 언제 급전지시가 떨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상시근무를 하고 있는 것. 예를 들면 갑자기 전력수요가 올라가거나 가동 중이던 발전기가 갑자기 멈출 것에 대비한 것인데 우리가 24시간 안정적인 전력공급을 받는데 적잖은 기여를 하고 있는 셈이다.

중앙제어실에 들어서니 직원 서너 명이 근무를 하고 있다. 이 발전소의 또 다른 역사를 만났다. 그는 김원기 한국수력원자력노동조합 화천수력발전소지부 위원장이다. 지난 1978년 입사 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8분 남짓한 홍보영상을 스마트폰으로 보여줬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근무자들의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직접 제작했다고 하니 그의 애착이 얼마나 큰지 가늠해볼 정도다.

김 위원장은 “지금은 변방에 있는 발전전원이지만 우리 국민들이 수력발전에 대해 보다 손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홍보영상을 직접 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특히 김 위원장은 “전력거래소로부터 급전지시를 받으면 사이렌과 함께 곧 물이 방류될 것이니 대피하라는 방송과 함께 기동을 위한 스위치를 켜게 되는데 스위치를 켠 뒤 5분 안에 전력이 송전선로를 타고 전국으로 공급 된다”고 설명했다. 또 “양수발전 직원들도 이 모습을 보면 너무 신기하게 생각 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김 위원장에게 큰 어려움이 뭐냐고 물었다.

김 위원장은 “(화천수력발전소가) 춘천지역에 배수펌프장치를 운영하고 있다”면서 현재 다른 지역의 배수펌프장치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고 있는데 이마저 떠안고 있어 힘들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그러면서 그는 “사실 배수펌프장치를 운영하는 시점이 장마철인데 우리 발전소는 다른 수력발전과 달리 홍수조절기능을 갖고 있어 이때 비상근무다 뭐다 손이 모자랄 정도인데 이 업무를 위해 직원을 현장에 배치하다보니 인력이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이 건물에는 이 발전소의 핵심설비인 수차와 발전기가 함께 위치하고 있다. 수차와 발전기를 둘러봤다. 70년이 훌쩍 넘게 운영된 발전소라고 보기 어려운 정도로 깨끗하게 잘 정리돼 있었다. 일제치하시대에 지어졌던 것은 건물만 있고 안에 발전설비는 설계수명이 다해 모두 교체됐기 때문이다.

이 건물은 지난 2004년 9월 14일 등록문화재 제109호로 지정됐다고 한다.


파로호 둘레 200km 달하는 거대 저수지
아군·적군 총탄으로 상처만 남은 ‘대붕제’

그리고 후문을 통해 화천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화천댐에서 먼 산을 바라보자 산들이 마치 서해안의 많은 섬을 보는 것처럼 웅장함을 과시했다. 그리고 멀찌감치 파란색으로 칠해진 지붕의 취수구가 눈에 들어온다.

이날 안내를 맡은 최원위 화천수력발전소 과장은 “파로호를 둘러싼 길이 200km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이 거리는 서울에서 대전까지 가는 길보다 훨씬 길다.

이곳에서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파로호 기념비.

이 기념비는 지난 1955년 이승만 前 대통령이 직접 방문해 장병들을 위문하고 ‘파로호’란 이름을 명명하고 직접 휘호를 내린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 이 발전소를 탈환한 국군 6사단은 지난 1955년 이 기념비를 건립했다고 한다.

현재 화천댐 위로 나 있는 길을 공도교라고 한다.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는 일제치하시대 중 건설된 화천댐 준공기념비인 ‘대붕제’란 이름의 기념비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최 과장은 “이 기념비는 화천댐의 준공을 알리는 것으로 한국전쟁 당시 유실됐다가 평화의 댐 공사기간 중 화천 댐 하류 30m 지점에서 발견돼 이곳으로 옮겨와 관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기념비를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일제식의 날짜는 어떤 이, 애국자(?)에 의해 지워져 있다. 또 이보다 더 가슴을 뭉클하게 했던 것은 이 기념비에 남은 총탄의 자국. 최 과장은 이것은 소총 총탄자국이고, 이것은 기관총 총탄자국이라고 설명했는데 그 수를 헤아려보니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우리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 있다.

최 과장은 “이 기념비는 우리의 아픔 역사인 만큼 대한민국 국민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자리를 옮기는 방안은 강구 중”이라고 했다.

현재 화천댐은 청경 2명이 교대로 지키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과 함께 젊은 영혼을 바쳐 이 발전소를 사수하려했던 넋이 함께 이 화천댐을 지키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에 이르게 만든다.

이렇게 4시간 남짓 짧은 시간여행이지만 화천수력발전소는 우리의 역사에서 우리 전력산업의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곳 중 하나다.

4시간 동안 취재에 도움을 준 박영준 화천수력발전소 관리팀장은 “화천수력발전소는 온갖 회한을 겪으면서 우리나라 전력산업의 역사와 맥을 같이 했고, 지금도 북한강 하류의 춘천·의암·청평·팔당수력발전소 등과 함께 수도권의 안정적인 전력공급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갈수기엔 용수를 공급하고 홍수기엔 홍수조절을 하는 등 수도권 대한민국 국민들의 젖줄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수력발전 핵심설비인 수차 국산화 나서
통일시대 북한 안정적인 전력공급 대비

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화천수력발전소는 새로운 통일시대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

그 동안 수력발전 핵심설비 중 하나인 수차는 국산화되지 못했다. 지리적 환경으로 볼 때 더 이상 수력발전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없고, 전원비율 중 수력발전이 점유하는 비율도 유독 낮기 때문이다. 수력발전용 수차의 수요가 없는데다 일제치하시대에 기술개발이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에 사실상 수차와 관련 기술개발은 뒷전으로 밀렸다.

그런데 최근 한수원은 전국 곳곳에서 운영되는 수력발전기의 수차가 설계수명이 잇따라 도래하고 있는데다 기후변화대응 등 동남아시아 등을 중심으로 크게 성장하는 수력발전시장을 겨냥해 수력발전의 핵심설비인 수차의 국산화 기술개발에 나섰다. 또 이와 함께 통일시대에 대비해 북한의 노후 된 수력발전을 개선하는 동시에 풍부한 수자원을 이용한 수력발전으로 북한의 안정적인 전력공급에 대응한다는 의미도 포함돼 있다. 일종의 투자인 셈이다.

현재 한수원은 1만5000kW급 수력발전용 수차에 대한 국산화 기술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이 기술개발을 완료하면 앞으로 3만kW급 등 그 이상으로 기술개발을 점진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전략을 갖고 있다.

이렇게 개발된 수차는 섬진강수력발전소용 수차지만 앞으로 설계수명이 만료되는 우리나라에 설치된 수력발전소용 수차에 점진적으로 적용될 예정이다. 화천수력발전소도 지금은 일본의 수차로 발전을 하지만 곧 우리 기술로 만든 수차가 장착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만든다.

전영택 한수원 수력양수본부장은 “현재 개발 중인 수차는 섬진강수력발전소에 설치될 것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앞으로 화천수력발전소 등 설계수명이 완료되는 수차를 중심으로 국산화된 수차를 점진적으로 교체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렇게 개발된 기술은 해외수력발전시장 진출의 초석이 될 것이며, 추후 통일시대에 대비한 북한의 안정적인 전력공급의 첨병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내다봤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