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파우시안 이코노미(Faustian Economy)
<칼럼> 파우시안 이코노미(Faustian Econo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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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5.15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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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철 외환은행 SIM지점장

 오늘날 글로벌 경제는 인류역사상 최대의 성공을 거둔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특히 인구 대국인 친디아의 약진으로 신흥국 진영의 중산층이 두터워지고 대량생산ㆍ대량소비가 더욱더 자생력과 활기를 띠면서 지난 십여년간 세계 경제가 ‘날렵한 코끼리’가 되어 이룩한 GDP성장률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發 금융위기가 글로벌 경제위기로 번지면서 이제 와서는 가진 것마저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두려움과 상실감의 시대가 도래하게 됐는데, 그래도 아쉬운지 세계의 지도자들은 지난 십수년간의 고도성장에는 못 미치더라도 아류에 가까운 지속가능한 성장(sustainable growth)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 입을 모으면서 추락하는 세계 경제를 사력을 다해 되살리고 있다.

 경제학에서는 과열성장의 후유증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연착륙(soft landing)에서 찾고 있는데, 따지고 보면 부상하는 중국이 세계의 공장이 돼 싼 값의 공산품을 대대적으로 만들어내고 Pax Dollarium(달러본위제도)으로 무장한 미국이 무제한 발권력을 동원해 중국을 위시한 신흥국 진영의 제품을 마구 사들이는 형태로 일궈온 것이 과거 십수년간의 지구촌 고도성장의 본 모습이요 과열성장이다.

이와 같은 과열성장의 다음 수순은 경착륙(hard landing) 아니면 연착륙인데 경착륙은 너무나 고통스러워 어떻게 해서든지 연착륙으로 유도하려고 G7 혹은 G20 등이 부심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지금껏 큰 욕심 안 부리고 적정 수준으로 성장세를 이어왔다면, 전세계의 경제를 이 지경까지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적정 수준의 성장이 무엇인가? 경제학의 또 다른 용어인 지대추구(rent seeking)에서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당대(this generation)의 성장을 위해선 당대가 제공하는 실물과 금융자원을 가져다 써야 하는데, 실물 부문에선 매장량이 제한된 지하자원을 차세대 혹은 차차세대(next or next-next generation)의 몫까지 가져다 쓰고, 금융 부문에선 Pax Dollarium과 영미식 금융제도에 따라 무한대의 금융자원을 가져다 쓰니, 지난 십수년간의 고도성장은 한 마디로 무분별한 지대추구의 결과에 다름 아니다.

덕분에 역사상 유례 없는 지구촌 중산층의 급증이 이뤄지고 여기에다 IT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구의 이동과 비즈니스 기회의 엄청난 폭발로 심지어는 제프리 D. 삭스라는 경제학자가 ‘빈곤의 종말’을 펴내면서 2015년이 되면 지구상의 모든 가난이 끝난다고 했을 정도다. 백년간의 은둔국이었던 중국도 숫자로 따지면 세계 최대의 여행객을 자랑하게 됐으니, 빈곤의 전형적인 모습인 ‘먹거리 걱정, 집 걱정’은 이제 소수의 고민으로 돼가고, 최근 중국의 인터넷을 달군 ‘젊고 패셔너블한 女걸인 등장’이 21세기 풍요의 현주소를 말해주고 있다.

 어쨌든 먹고 마시고 입고 자고 하는 인간다운 생활을 빈곤 퇴치의 ABC로 삼았던 과거의 패러다임이 사라지게 된 것도 그동안의 고도성장이 가져온 긍정적인 면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의 내용이 지대추구형 과열성장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성장 공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이제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겠다 하는 것이 바로 지속가능한 성장이다.

이와 같은 각성은 지금의 엄청난 풍요가 결국 매장량이 유한한 지하자원의 무단ㆍ과잉사용에서 비롯되었고, 하필이면 화석연료가 대부분이어서 환경파괴적이요 이에 따른 지구온난화로 자칫하면 인류 절멸의 위기까지 초래할 우려가 있으니 ‘sustainable growth’가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래도 미련이 있는지, 경제성장과 환경이 대부분의 경우 상생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녹색으로 묶어 녹색성장이라는 경제성장 패러다임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것이다.

 ‘A History of Knowledge’를 쓴 Charles van Doren이 “……, because man is such an incredibly dirty animal.”이라고 했듯이, 인류의 고도성장과 지나친 풍요가 지구를 병들게 하고 있다. 1800년 세계 인구는 10억명, 1900년 20억명 하지만 지금은 68억명으로서 불과 1세기만에 48억명의 인구가 급증했다. 누군가 인간을 바이러스라고까지 폄하했는데, 이와 같은 표현이 딱 들어맞는 것이 바로 지구온난화요, 인류의 어머니인 지구를 병들게 했으니, 몸부림치는 지구는 인류에게 분명 큰 재앙을 내릴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 100년간의 물질적 풍요에서 인류는 과연 잃어버린 게 없을까? 앞서 얘기한 ‘패셔너블한 女걸인’의 예에서 보면, 과거의 가치관으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인데, 허우대가 멀쩡한 사람이 어찌 그와 같은 굴욕적인 행위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구걸로 얻는 몇 푼의 적선으로 끼니를 이어가도 부끄러울 게 없는 것이 아마도 오늘날 풍요의 단면일 것이다.

 풍요보다도 가난이 지배적이었던 과거엔 배고픔을 정신적 포만으로 채웠는데, 지구를 병들게까지 하면서 손쉬운 화석연료의 대대적인 사용으로 일군 물질중심의 경제문명이 결국 독일의 문호 괴테의 ‘파우스트’를 연상케 하고, 이와 같은 지대추구형 고도성장의 끝자락에서 아마도 ‘꽃 보다 정신’의 문화운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본다.

 인구 68억명이 석유에 취한 채 역사의 유례없는 풍요와 사치를 만끽하다, 소수의 지각 있는 계층이 이와 같은 ‘파우시안 경제’는 이제 넌더리 났다, 대안 경제(alternative economy)의 출현이 목마르다 하면서 대대적인 정신운동이 일어나고 지금과 같은 무늬만 녹색인 정신운동을 대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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