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에너지사랑 문예공모전 수상작 – 촛불과 추억>
<제3회 에너지사랑 문예공모전 수상작 – 촛불과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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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8.11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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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두산중공업-
해마다 음력 2월 마지막 날이면 충청도, 경상도, 경기도 그리고 서울 등 전국 각지에 터를 잡고 살고 있는 우리 사남매는 어김없이 엄마가 사시는, 우리 사남매의 고향이기도 한 경기도 안양의 집으로 모인다. 그간 입맛에서 잊혀져 있던 무나물, 고사리나물, 배추나물과 억지로 찾아먹을 일 없는 약과와 한과, 그리고 부엌 저 한구석에서 기름진 향으로 내 콧등을 유혹하는 꼬치 및 산적 등 엄마가 준비하신 소박하지만 정성 가득한 음식이 한상가득 차려지는 날이다. 바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일, 제삿날이다.

아버지는 우리나라가 산업화를 거치며 비약적인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진 1970~80년대 청장년 시기를 보낸 대표적인 격동의 일꾼이었다. 해방 바로 전 해에 전라도 완주군 감나무 산골 깊숙한 산자락에서 숯장사를 하며 하릴없이 막걸리로 매일을 보내던 고주망태 할아버지의 9남매 중에 장남으로 태어나 전쟁물자 송출과 보릿고개 등으로 어린 시절을 힘겹게 보내고 학교에는 문턱에라도 갈 수 있는 형편이 못되어 달리기 특기생으로 초등학교만을 간신히 졸업한 아빠, 먹을 것 입을 것 없는 여덟 동생들 뒷바라지하기 위해 동네 부잣집 머슴살이 하느라 정규교육조차 제대로 배우지 못한 아빠다.

고등교육은커녕 정규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아버지는 벌이가 변변치 않을 수밖에 없었나보다. 별다른 기술을 가지고 있을 리 없었던 젊은 시절의 아버지는 한 가정의 장남으로서 8남매 동생들의 무지막지한 학비 마련과 자식들을 부양하기 위한 능력도 노력도 보이지 못한 당신 부모님 봉양을 위해 1960년대 초반 베트남 전쟁에 파병을 가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동생들을 건사하기 위해 베트남전쟁을 치르며 옆구리에 총알이 관통하고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는 등 수차례 위기와 고초를 겪으며 아버지는 늦둥이 막내인 나를 비롯한 우리 4남매를 세상에 내어놓기 위하기라도 한 듯 파병기간을 마친 후 무사히 귀국하게 되었다.

그 후 곧 아버지는 동네 아주머니를 매개로 한 중매를 통해 엄마를 만나게 됐다. 엄마가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게 된 것을 아직까지 일생 최대의 흠결과 한으로 꼽는 이유의 시작은 아마도 베트남 전쟁을 다녀온 아버지가 결혼 당시까지 모아놓은 돈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하고 있을 것이며, 이는 지질하게 가난한 집의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자신의 능력이 닿는 최대한의 노력을 통해 반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고자 했던 아버지시대의 청년들이 가졌던 유일한 무기인 성실함으로부터 기인한 상처일 것이다.

잠깐의 신혼생활을 보낸 부모님은 전라도 시골을 떠나 나의 고향이자 부모님 생의 터전인 안양으로 이전을 하게 된다. 아마도 지긋지긋한 시골생활을 도피하고자 한 탈출구이자 결혼과 동시에 곧 태어날 첫째 아이를 갖게 되어 더 이상 동생들의 뒷바라지가 불가능한 이유에 따른 유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터전은 아무런 이유나 근본이 없이 안양이라는 도시가 선택되었고 그렇게 선택된 결정적인 이유는 가난이라는 유일한 이유 때문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기반 없이 시작한 부모님 결혼생활은 곧 다시 만나게 될 이별을 의미하게 된다. 화장실도 없는 쓰러져 가는 판잣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부모님은 하루하루를 연명하다시피 도시생활을 시작하였고 별다른 기술이 없던 아버지는 이웃 주민을 통해 중동의 건설 붐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중동, 특히 리비아에서 대한민국 건설사가 수로를 건설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홀연히 타향만리에서 새로운 출발을 결심하였고 수년 동안 리비아를 비롯한 중동의 여러 나라를 떠돌며 건설인으로 살던 아버지를 내가 처음 본 것은 6살이 되어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는 양손 가득 자동차며 기차며 비행기로 구성된 모형 장난감을 들고는 어린 날 낮잠에서 막 깨어난 내 앞에 떡 하니 갑자기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것이 나와 아버지의 공식적인 첫 만남으로 기억한다.

아버지는 항상 바빴다. 없는 살림살이에 배운 것이 없어 자신 있게 앞에 나설 줄 몰랐던 아버지는 항상 우리 4남매를 키우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시던 모습 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매일같이 새벽 5시 30분이면 일어나 찬물로 세수를 하시고는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6시가 되면 두 시간동안 자전거를 타고 안산의 조그마한 공장에 간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화학약품을 취급하는 작은 공장이라고 들었던 것밖에. 당시에는 토요일 휴무가 없었던 시절이라 아버지는 일년 중 최소 310일을 그렇게 보냈던 것이고 일요일에도 정해진 휴일을 활용하여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자주 출근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항상 바쁘고 힘들게 사셨던 아버지는 우리 4남매에게 아주 작은 추억조차도 만들어 주지 못했고 당시에는 그것이 그렇게 서럽고 아버지가 밉고 이런 가정환경에서 사는 나 자신이 그렇게 초라할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는 막내인 나를 유독 예뻐했다고들 한다. 내가 많은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아버지가 나의 어린 시절을 풍요로운 추억으로 가득 채울 만큼 많은 경험을 공유하지는 못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엄마와 형, 누나는 입버릇처럼 아버지가 그래도 막내인 나를 많이 예뻐하고 어디라도 데리고 가고는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나 내가 강렬하게 기억하는 아버지와의 추억은 단 하나 밖에 없다.

어린 시절의 나는 아버지가 너무 싫고 무서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는 투박하고 말주변도 부족하고 사람들하고 자신 있게 어울릴 줄 아는 멋진 아빠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정다감하지도 않았다. 항상 무뚝뚝하고 웃음기 없는 얼굴이었으며 별다른 말도 하지 않는 아버지였다. 게다가 아버지는 가끔씩 우리 4남매를 모아 놓고는 아무런 설명도 이유도 없이 회초리를 들곤 하셨다. 왜 맞아야 하는지도 모르게 가족의 일원으로부터 폭력을 당하는 것은 굉장한 공포이자 고통이지만 우리 4남매는 그런 아버지의 회초리를 아무런 저항이나 거부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냥 눈물을 최대한 참다가 참기 어려운 정도로 아프면 울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자란 기억뿐이었다.

당시에는 정전이 잦아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던 시절이었다. 지금이야 정전이 되면 온 가정은 불평과 불만으로 들끓고 공장을 중심으로 한 산업계는 생산성 저하로 인한 경제성 문제로 연일 뉴스에 집중되는 시절이지만 1980년대 중반의 당시는 정전이 그다지 큰일이 아니던 시절이었고 각 가정은 정전을 대비하여 양초와 손전등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당시의 어린 나는 발전소가 전기를 만들어낸다는 기본적인 지식조차 모르는 어린 시절이었다. 전기라는 것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그리고 무엇인지도 모른 채 스위치만 누르면 천장에 있는 전구, 그러니까 불빛을 내는 백열등에서 우리 집을 환하게 밝혀주는 불빛이 저절로 생겨나는 줄 알았던 것이다. 전기라는 것이 무섭기도 하고 유용하기도 한 것인 줄은 알았지만 그것이 원자력이든 화력이든 수력이든지 간에 발전소라는 곳에서 불과 물의 힘으로 생겨나는 것인 줄은 꿈에도 모르던 무지몽매하던 어린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전으로 인한 어두움이 나에게는 참으로 따뜻한 기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아버지는 우리 가족들을 따뜻하게 안아주었던 기억이 나에게는 없다. 다른 아버지들 같으면 술이라도 마시고는 으레 취한척이라도 하며 가족들을 안고 보듬고 뽀뽀라도 하였을 터인데 술도 마실 줄 모르던, 아니 술도 먹지 않았던 내 아버지는 우리 가족들을 따뜻하게 안아주거나 품어준 적 기억이 없다. 그런데 유일하게 아버지의 숨결을 느끼고 아버지의 냄새를 맡게 해주는 때가 있었으니 바로 정전이 발생했던 때로 기억한다.

난 지금도 내 아버지의 살 냄새와 몸 내음을 기억한다. 특히 기름냄새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더 구수한 냄새로 이루어진 아버지의 얼굴냄새를 정확히 기억하며 그 냄새는 지금의 내 몸에서 나는 냄새와 아주 유사한 느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의 냄새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정전이 나면 항상 아버지는 우리 4남매를 꼭 껴안아 주셨기 때문이었다. 평생 살아오면서 아버지는 우리 자식들을 포근히 안아준 적이 거의 없지만, 꼭 정전이 되면 그렇게 우리 자식들을 방 한 가운데 이불 위에 앉혀 놓고는 그다지 넓지도 않은 자신의 양팔로 가족들을 꼭 안아주시곤 하셨다.

그리곤 파라핀으로 만든 하얀색 양초에 성냥으로 불을 붙이고는 방바닥 한 가운데에 촛불을 켜곤 하셨다. 마치 무슨 의식이라도 하는 것 같은 자세로.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와의 가장 강렬하고 따뜻하고 유일한 추억은 바로 그것이다. 정전이 날 때마다 해주신 아버지의 따뜻하고 꽉 끼는 듯한 느낌의 포옹과 살 냄새 그리고 양초의 불꽃에서 나는 불 내음. 남들에게는 귀찮고 불편하고 눈앞이 깜깜한 경험이지만 정전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아버지의 따뜻함을 추억하고 아버지를 기억하게 하는 유일한 매개체가 되어버렸다.

아버지를 추억할 일은 요즘 점점 더 없어지는 듯하다. 아마도 돌아가신지 오래된 것과 내가 한 아이의 아비가 된 후 점점 나이를 먹어감, 그리고 정전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 요즘의 편리한 에너지시스템으로 인해 아버지를 추억할 수 있는 촉매가 사라진 것 때문이라고 한다면 내 스스로에게 지나친 관대함인 것일까. 아버지와의 별다른 추억 없이 자랐다는 것이 당신을 추억할 거리가 없다는 것과 동의는 아닐 것이다.

어느덧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내 나이는 내 아버지가 리비아니 사우디니 하는 중동 어느 곳 모래바람 한 가운데의 건설현장에서 소리 나지 않게 묵묵히 조국의 산업화를 이끌던 즈음의 시기와 겹침을 생각한다. 아버지는 아무런 가진 것 없이 나고 자라 너무나도 가슴 아픈 인생을 살다 가신 불쌍한 아버지이다.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가족의 살길을 찾아 베트남의 전장과 중동의 모래바람을 찾아 떠돌이 생활을 하는 청장년을 보내야했고 그런 아버지의 피를 받은 나는 내 나라의 경제와 산업사회 전반에 강인하고 건강한 생명력을 지속적으로 제공해 주기 위해 전기에너지를 생산해 내는 소임을 다하고 있다.

부모와 자식이 닮는 다는 것은 비단 외모와 성향만은 아닐 것이다.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그 아비와 어미가 보여주는 희생과 보살핌의 정신은 시나브로 자식에게 그대로 전해지고 이어져 한 가정을 먹여 살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지탱하게 하는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유지하게끔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마흔이 다 되어가는 내게 주변의 사람들은 요즘 따라 더욱 그런 말을 하곤 한다. 지 애비하고 똑같다고. 먹고 쓰고 입고 아끼는 것까지.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을 시절이라면 치를 떨게 싫어했겠지만 더 살아보니 닮았다는 그 말 자체가 정감 있게 느껴지는 것은 고단한 인생을 참으로 어렵지만 잘 버텨냈을 내 아버지에 대한 감사함과 더 잘해 드리지 못한 회한에서 나오는 보상심리일지도 모른다.

노란온기로 양 끝에 마주 선 두 개의 촛불은 아버지를 위해 차려진 저 제사상 위에서 지금 나를 응시하며 은은하게 불타오르고 있다. 나를 향한 촛불의 응시는 잦은 정전으로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잠들고 포근해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잠깐이나마 일깨워주고 있다. 촛불은 강렬한 열망이 들끓는 광장에만 있는 게 아니라 너무나 보고 싶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속에도 절절히 타오르고 있다.

맛있는 먹거리와 값비싼 명품, 세상을 환하게 밝혀주는 전기와 에너지, 그리고 편리와 부유함이 넘쳐나는 요즘. 먹을 것도 풍족하지 않고 명품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시절 잦은 정전으로 읽고 있던 책을 쉽사리 놓아야 했고 어두운 밤에는 돌아다니기도 어려웠던 깜깜함만이 주변을 감싸던 시절. 많은 것을 누리지는 못했지만 가슴 따뜻했던 시절, 가끔씩은 그 시절을 추억하며 아버지를 그려본다. 전기가 넘치고 정전이 발생할 일이 거의 없는 요즈음. 별 쓸 일이 없고 아버지의 기일이나 되어야 꺼내어 보게 되는 저 촛불. 촛불은 정전을, 그리고 정전은 내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그렇게 꺼내게 만들고 매년 한 번씩 나는 그간 잊어버린 아버지와의 가난하고 소박했지만 나름의 따뜻함이 있었던 어린 시절을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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