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전력산업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① 어제는 힘들었다
우리나라 전력산업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① 어제는 힘들었다
  • 김진철 기자
  • kjc@energytimes.kr
  • 승인 2008.04.14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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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과거, 바로 위기가 기회였다”

① 어제는 힘들었다
② 전기요금 딜레마 풀어야
③ 구조개편 언제까지...
④ 기후변화대응 역할은
⑤ 해외서 희망날개 달아야

우리나라에 전기가 들어온 지 120년.

그 동안 우리나라 전력산업은 최고의 자리를 향해 쉼 없이 달렸다. 그 결과 발전플랜트와 원전 종주국에 원전 기술을 수출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송전설비는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바다 위에 송전선로를 건설하는 대형 프로젝트로 한전은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에디슨상’을 수상한 바 있다.

전기품질을 계산할 때 주로 이용되는 지표인 송·배전 손실률은 4.5%에 불과하다. 전력산업의 선진국이라 일컫는 일본·대만·프랑스보다 앞서 있고, 손실률이 7%인 미국과 8.7%인 영국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전기품질이 앞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단 1초의 정전에도 국민들은 용납하지 않는다. 전력산업의 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우리나라만 유난스러울 만큼 예민하다. 이는 그만큼 우리나라의 전기품질이 우수함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지 한전 브랜드인 ‘KEPCO’만으로 통한다. 그 이면엔 우리나라 전력산업의 아픈 과거가 있었다. 해방 이후 북한의 일방적인 단전, 이어 한국전쟁 등으로 우리나라 전력산업은 한없이 무너졌다. 그리고 제한송전의 아픈 과거를 갖게 됐다.

1970년대 2차례에 걸친 석유파동은 우리나라 전력산업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 위기가 곧 기회였다. 그 동안 수력발전소와 중유발전소에 의존했던 우리나라 전력산업은 유연탄발전소와 원자력발전소라는 새로운 해법을 찾아낸 것이다.

이 과정 속에 우리나라 전력산업은 원자력발전소라는 꽃을 피웠다. 이 산업은 우리나라 발전산업을 이끈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된다. 최근 들어선 원전종주국에 우리나라 원전 기술을 수주했다는 보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업계 관계자들은 우리나라 전력산업도 일대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입을 모은다. 우선 전기요금 현실화라는 딜레마에 묶여 있고, 10년 간 지루하게 끌고 온 전력산업구조개편이라는 함정에서 벗어나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는 숙제도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전력산업은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최근 업계는 세계적 이슈로 떠오른 기후변화대응 방안으로 기술개발과 환경경영으로 앞서가고 있다. 이와 더불어 새로운 시장개척을 위해 해외서 새로운 판로를 개척하고 있다.

본지는 창간을 맞아 우리나라 전력산업에 대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조망해 볼 수 있는 기획기사를 5회에 걸쳐 다뤄본다. <편집자주>


“아픈 과거, 바로 위기가 기회였다”
-제한송전 아픔 넘어 고품질 전력공급 기반 마련
-2차례 걸친 석유파동, 원전·火電 건설의 청신호


1887년 3월 6일, 경복궁 건청궁에 전등불이 켜진다. 전기문명을 접하게 되는 순간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문명을 받아들이는 주체가 아니라 열강 제국주의의 수탈 대상으로 객체였기 때문이다. 한 개의 문명을 받아들이는데도 사회적 갈등과 반목이 있었고 전기 또한 예외는 아니었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그리 자랑할 만한 일은 못된다. 그러나 전기문명이 시작된 것에 대해선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나라 전력산업은 경성에 전철이 다니기 시작하면서 탄력을 받기 시작한다. 전철이 야간 운행을 하면서 매표소 주변에 가로등이 설치되기 시작했고, 이로써 전등영업이 시작된 것으로 보면 된다.

지난 1929년 우리나라의 발전설비용량은 171만2000kW에 불과했다. 이 중 부전강수력발전소 등 수력발전이 95% 이상을 차지할 만큼 전력사정은 여의치 않았다. 일본이 패전했던 1945년 당시 설비용량이 172만2700kW이었던 점을 볼 때 대륙병참기지 정책의 부산물이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해방 이후 1948년 5.10 총선으로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열됐다. 북한은 총선 4일 뒤 남한지역 송전에 대한 단전조치를 감행, 남한은 호롱불과 촛불에 의지해야만 했다. 당시 남한의 전력생산량은 5만8000kW에 불과했다.

업친데 겹친격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1950년 5월 7만3557kW이던 전력이 8월 1만1333kW로 떨어졌다. 1951년 4월 전쟁이 교착상태로 접어들면서 조선전기주식회사·경성전기주식회사·남선전기주식회사 등 남한을 대표하는 전기3사는 피해복구와 발전을 서둘렀지만 전쟁 인플레이션으로 전력증강은 고사하고 복구에도 힘이 부쳤다.


극단의 조치로 전기3사는 전력난을 타개할 방안으로 통합하기로 하고 1951년 5월 이 안을 국무회의에 처음으로 상정하게 된다. 이후 1961년 2월 8일 한국전력주식회사법(안)이 국무회의를 거쳐 민의원에 회부된다.

통합이 이뤄질 것 같은 분위기였으나 같은 해 일어난 5.16 군사혁명으로 잠시 멈칫한다. 그러나 6월 8일 혁명정부는 서둘러 한국전력주식회사 창립 주총을 열고 7월 1일 한국전력공사의 전신인 한국전력(주)를 발족시켰다. 당시 발전설비용량은 36만7254kW였으며, 발전 가능한 용량은 30만2000kW에 불과했다.

혁명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워 추진한다. 이와 더불어 국가 공업경제 진흥의 발판이 될 동력자원 확보에도 역점을 뒀다. 이에 발맞춰 한전은 제1차 전원개발 5개년 계획(1962∼1966년)을 수립, 본격적인 전원개발사업에 착수한다. 이 기간 중 한전은 발전소를 조기에 준공하는 등의 노력으로 해방 이후 19년 동안 되풀이되던 전력난을 해소할 수 있게 됐고 1964년 4월 1일을 기해 제한송전을 전면 해제하게 됐다.

제한송전 해제라는 기쁨도 채 가시기도 전 인 1965년 발전설비의 성장이 제자리걸음인 가운데 수요가 급급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2년 뒤 수력발전의 수위가 급격히 떨어지면서 일부 제한송전에 들어갔고 9월 최대출력 73만kW, 최대수요 80만kW로 부득이하게 10개월 동안 제한송전의 악몽이 시작됐다. 원인은 수급조절실패와 수력발전의 의존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제2차 제한송전은 1973년 10월 석유파동으로 우리나라 전력산업은 일대 혼란기에 접어든다. 이듬해 아랍산유국의 대한원유공급제한을 해제하면서 일단락 됐지만 우리 정부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만 했다. 원인은 중유발전소의 의존도가 높았다는 것.

정부는 대안으로 원자력발전소와 유연탄석탄화력발전소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前대통령은 원전을 건설해 주종에너지원으로 활용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우리나라의 최초 원전이 고리원전 1호기가 착공한 상태였지만 이후 5기의 원전 건설 계획은 이 시기에 결정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후 원전은 우리나라 발전산업의 없어서는 안될 핵심 발전소로 부각되기 시작한다. 이후 8·90년대 고도성장의 주 동력원으로 성장했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최근 들어선 화석연료의 대안에너지로서의 역할마저도 훌륭히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 전력 전문가들의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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