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철 기자의 에너지이야기-(1)>
남북이념 갈등으로 남한 춥고 배고파
<김진철 기자의 에너지이야기-(1)>
남북이념 갈등으로 남한 춥고 배고파
  • 김진철 기자
  • kjc@energytimes.kr
  • 승인 2012.12.10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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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한반도의 에너지산업은 제로베이스. 남북한의 이념갈등에 휩싸이면서 북한에서 내려왔던 전력은 끊겨버렸고, 남한은 춥고 어두웠다. 당시 한반도의 경제시계는 제자리에 멈췄다.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 남북의 이념갈등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은 그나마 남아 있던 남한의 주요 산업시설을 파괴시켰다.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난 후 우리의 유일한 에너지공급원으로 장작과 숯 등 신탄(薪炭)이 절반을 차지했다.

남한에서 필요한 유류는 해외 원조로 조달받았고, 가뜩이나 얼마 남지 않은 전력설비는 제한송전으로 표출됐다. 그나마 북한의 사정은 좀 나았다. 한반도 주요 에너지공급처였던 탄광과 수력발전의 80%이상이 북한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접어들면서 우리 경제는 소비지출과다의 경쟁체제로 유지됐다. 당시 에너지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민간 등의 재원이 턱없이 부족했다. 국민총생산의 98.8%가 소비 지출. 수입은 국민총생산의 12.6%인 반면 수출은 3.3%였다.

당시 의지할 수 있었던 에너지산업은 석탄산업. 한국전쟁 이후 석탄생산의 본격화를 위해 1966년 3월 국영탄광의 민간 불하. 1956년 55만 톤에 불과하던 민영탄광의 석탄생산이 1961년 277만 톤으로 5배 증가했다. 의지할 에너지는 석탄밖에 없었던 셈이다.

전력산업을 살펴보면 해방 당시 남한의 발전설비는 한반도 전체 발전설비의 11.5%에 불과했다. 한반도 총 발전설비용량은 172만3000kW. 지금으로 따져보면 최근 준공된 신고리원전 1·2호기(100만kW×2기)보다 적은 용량이다. 그나마 환경적인 영향을 받는 수력발전이 91.5%, 화력발전이 8.5%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남한의 발전설비용량은 19만8000kW. 현재 발전설비용량이 8000만kW에 달하는 것을 감안하면 420배나 성장한 셈이다.

발전설비는 중화학공업 육성을 표방한 2차 경제개발계획에 의거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 기간 중 연평균 발전설비 증가율은 27.9%였다. 1962년도 우리의 발전설비용량은 434만kW, 5년 뒤인 1967년은 917만kW까지 2배 이상 늘어났다.

우리 정부는 정유 산업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SK에너지의 전신인 대한석유공사가 1960년대 설립됐다. 1·2차 경제개발로 석유수요가 급증하자 정유시설의 중요성이 증대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첫 정유공장은 미국 걸프사가 합작파트너로 2000만 달러의 차관을 제공받는 조건으로 정유공장을 걸립했는데 1964년 2월 시운전을 거쳐 4월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갔다. 효자수출품목의 1위와 2위를 다투는 석유제품의 서막을 알리는 시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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